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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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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랄드 빛 바다와 오름 위로 펼쳐진 초장, 봄기운 가득한 유채꽃 밭, 소담한 돌담길과 바람이 불어오는 풍차 해안도로. 제주의 풍경은 언제나 정겹고 평화롭다. 그러나 이토록 평화로운 제주가 전쟁을 준비하는 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제주가 일본본토와 가깝다는 이유로 전략적인 전쟁 전초기지로 이용한다. 특히 태평양전쟁 후 제주를 최후의 보루로 삼으면서, 섬 전체는 전쟁의 화염에 휩싸일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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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에메랄드 빛 바다와 오름 위로 펼쳐진 초장, 봄기운 가득한 유채꽃 밭, 소담한 돌담길과 바람이 불어오는 풍차 해안도로. 제주의 풍경은 언제나 정겹고 평화롭다. 그러나 이토록 평화로운 제주가 전쟁을 준비하는 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제주가 일본본토와 가깝다는 이유로 전략적인 전쟁 전초기지로 이용한다. 특히 태평양전쟁 후 제주를 최후의 보루로 삼으면서, 섬 전체는 전쟁의 화염에 휩싸일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한다. 오늘 날까지 아픈 역사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제주. 이번 여행은 광복 제 72주년을 기념하며 제주 안에 숨겨진 일제의 흔적을 찾아보고, 이에 맞섰던 제주 항일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자.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삶의 터전에서 죽음의 땅으로알뜨르 비행장


‘아래 있는 넓은 뜰’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알뜨르. 농지 겸 목초지로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이곳이 전쟁과 죽음을 준비하는 곳으로 변하게 된 것은 일제가 이곳을 군용비행장으로 이용하면서부터다.

일본군들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모슬포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중일전쟁, 남경폭격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알뜨르를 전쟁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더니 1942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이 지역을 본격 요새화 하여 군사기지화 한다. 전쟁의 막바지, 일본이 감행한 ‘가미카제’ 훈련이 이뤄졌다고 전해지는 만큼 아픈 역사를 품은 장소다. 넓은 들판 가운데 곳곳에 20개의 격납고가 있으며 현재는 19개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 하고 있다.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자연으로 숨긴 제주의 아픈 비밀셋알오름 일제 진지동굴

바다 위 형제섬, 우뚝 솟은 산방산, 장엄한 한라산까지 셋알오름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그야말로 그림 같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오름이 일제 강점기 전쟁을 준비하는 군사시설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1943년 일제는 연합군의 폭격으로부터 전투사령실, 병사, 탄약고, 연료고, 비행기 수리 공장, 통신실 등 중요 군사 시설을 감추기 위한 동굴진지를 구축한다.

제주 내 동굴진지 중 동공의 규모는 가장 크지만 유독 입구를 발견하기 힘든 이유는 진지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계곡을 파내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가 얼마나 철저하게 전쟁 방어 준비를 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자연 헤집은 인공의 흔적송악산 해안 일제 동굴진지


송악산 아래로 깎아지를 듯한 해안절벽. 이 매서운 절벽을 인위적으로 뚫어낸 흔적은 보인다. 바로 일제 당시 구축된 해안 동굴진지이다. 이 동굴은 일제의 패망이 거의 확실시되던 1945년에 건립됐다.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수세에 몰리자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 내 6개 지역과 제주를 포함, 7개 지역에서 결호 작전을 펴 나간다.

이중 제주에서 진행된 작전은 ‘결 7호 작전’인데 이를 위해 이 해안 동굴진지도 만들어졌다. 해상으로 들어올 연합군의 함대를 막기 위해 송악산 절벽을 뚫고 이 안에 소형 선박을 숨겨놨다가, 폭탄을 싣고 자살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서였다. 진지 구축을 위한 굴착 작업에는 많은 제주 주민들이 강제동원 되어야했다. 이유 모를 전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절벽을 뚫어야만 했던 주민들의 희생이 깃든 곳이다. 현재 15개의 진지가 남아있다.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아버지의 아픔을 위로하는 곳제주평화박물관


제주 곳곳에 상처로 남은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되짚어보자는 목적으로 세워진 제주평화박물관. 이곳은 동굴진지 구축을 위해 일제에 강제동원 되었던 故이성찬씨의 아들 이영근씨가 세운 곳으로 민간인들로부터 수집한 일제 관련 기록물 및 기물 등을 모아 2004년 개관하였다. 일본군이 사용하던 군수품, 문서 및 사진자료, 생존자 증언 자료, 땅굴 작업을 위한 소장품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박물관 뒤에는 가마오름 동굴진지가 있어 관람객들이 직접 진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3층 구조의 동굴진지 통로를 따라가다 보면 일본군 사령관실과 회의실, 의무실, 작업실 등이 재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쪽 벽면에는 누군가의 고통이 서린 곡괭이 자국이 여전히 선명하다.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역사의 아픔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 항일운동의 시작점, 순국선열들의 혼이 녹아있는조천만세동산


제주의 일제 통치는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계속되지만, 일제의 억압에 맞서 도민들의 항거도 계속 이어졌다. 제주 항일운동의 시발점인 조천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시작된다. 김장환에게서 3.1운동의 상황을 전해들은 숙부 김시범은 제주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는데, 동지를 규합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간다. 이내 3월21일 조천리 미밋동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3월24일까지 조천장터 등지에서 민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시위 주역들이 체포되면서 조천만세운동은 종료되지만 이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제주와 서귀포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제주 민족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정신을 이어받아 조천만세동산에는 제주항일기념관과 더불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추모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애국선열 추모탑’과 만세운동의 뜻을 기리는 ‘3.1 독립운동 기념탑’이 서있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애국지사들을 떠올리며 찬찬히 동산을 걸어보자. 선조들이 지켜낸 자유와 정의가 얼마나 값진지 깊은 감동으로 전해진다.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제주의 아픈 역사 돌아보는 다크투어리즘 <8.15를 통해 보는 제주 항일 역사의 발자취>
바람보다, 파도보다 더 강한 해녀의 정신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공원


한국 최대의 여성 주도 항일 운동인 해녀의 항일 운동은 부당한 해산물 수매 가격에 대한 분쟁에서 비롯된다. 당지 관제 해녀어업조합이 일본 상인에게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해산물을 매입하는 특혜를 주자, 이에 분노한 해녀들의 집단 항의가 1932년 1월 7일 세화오일장에서 일어난다. 해녀들의 열성적인 시위 끝에 제주도지사는 결국 해녀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제는 이 사건의 조사를 명목으로 제주도내 청년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는 계속되지만 1월 27일 종달리 시위를 끝으로 해녀들의 항거는 일제에 의해 진압된다.


  

유의사항
※ 위 정보는 2022-08-24 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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