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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과 다크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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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정해진 시효가 없다” 역사를 지나가 버린 시간, 과거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제주에는 4.3이 있었다. 4.3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를 기억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4.3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의 결실을도 조금씩 맺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역사적인 아픔이 있는 현장을 찾아가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 듣고, 교훈을 얻는 것이다. 제주의 역사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도움 (사)제주다크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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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시효가 없다<제주 4.3과 다크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역사에는 정해진 시효가 없다” 역사를 지나가 버린 시간, 과거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제주에는 4.3이 있었다. 4.3이라는 단어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를 기억하고,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우리가 역사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4.3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의 결실을도 조금씩 맺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은 역사적인 아픔이 있는 현장을 찾아가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고, 듣고, 교훈을 얻는 것이다. 제주의 역사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 보자. 

 

도움 (사)제주다크투어

도민 강제 노역의 현장<알뜨르비행장>


송악산 근처에 있는 ‘알뜨르비행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가 정뜨르비행장(현재 제주공항)과 함께 전쟁의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알뜨르’는 제주어로 아래 벌판을 의미한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원래 이곳은 농사를 짓던 농지 겸 목초지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다. 66ha 넓이의 비행장 안에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규모의 20개 격납고를 세웠다. 현재 19개 원형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격납고가 있는 섯알오름은 4.3사건의 학살터이기도 하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일제가 만든 폭탄 창고에서, 폭발로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는데, 4.3 당시 예비 검속으로 수감됐던 일반인들이 그곳에서 학살됐다. 알뜨르비행장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초 기지로 쓰이기 시작했다. 약 700km 떨어진 중국의 도시인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많은 전투기가 이곳에서 출격했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관동군 등 일본군 정예 병력 6~7만여 명이 제주도에 주둔했는데, 당시 제주도 인구가 25만여 명이라고 하니, 제주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일본군이 제주로 들어온 것이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20만 평에서 80만 평으로 규모가 커진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도민이 강제 동원됐는지 유추할 수 있다. 요즘 알뜨르비행장의 모습은 어떨까. 견고하게 만든 탓인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에피소드 한 가지를 소개한다면, 알뜨르비행장에서 일본군 장교로 근무했던 이들이 이곳을 방문한 뒤 이 지역의 한 학교에 성금을 전달하려다 거절당한 사례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와 4.3의 아픔을 간직한 곳 <섯알오름 진지>


알뜨르비행장 안으로 조금 더 들어오면 섯알오름 일제 동굴진지와 섯알오름 일제 고사포 진지를 마주하게 된다. 국가등록문화재 제310호인 섯알오름 일제 동굴진지는 태평양전쟁 당시 중국 본토 공격을 위한 도내 동굴 진지 가운데 동공의 크기가 가장 크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격자 미로형으로 출입구가 6곳이며,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부터 중요한 군사시설을 지하에 감추기 위해 구축됐다. 중요 군사시설은 전투사령실, 탄약고, 연료고, 비행기 수리공장 등이다. 일제 동굴진지는 현재 출입이 불가하다. 붕괴위험으로 무너짐 방지용 버팀 철골이 세워져 있다. 일제 고사포 진지는 알뜨르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이다. ‘고사포’란 항공기를 사격하는 데 쓰는, 양각이 큰 포를 말한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1937년 중일전쟁 초기에 구축된 고사포 진지는 1943년에 콘크리트 구조물로 포대를 새롭게 정비했다. 고사포는 360도 회전이 가능해, 어느 곳이라도 조준할 수 있다고 한다. 사정거리 200km에 이르는 미군 B29 폭격기에 대응할 수 있는 최신형 고각포로 대체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하니, 위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고자 했던 증거를 보여주는 시설물이다. 두 곳 모두 일제 침략상을 보여주는 전쟁 유적이자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잃어버린 마을이지만, 우린 잊지 말아야<곤을동 마을터>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곳곳이 4.3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지만,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된 곳도 많다. ‘곤을동 마을’은 그중 하나다. ‘항상 물이 고여 있는 땅’이라는 데서 유래한 곤을동은 역사에 따르면 고려시대 때부터 부락을 형성한, 최소 7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곤을동은 화북천 지류를 중심으로 ‘안곤을’에는 22가구, 화북천 두 지류의 가운데 있던 ‘가운뎃곤을’에는 17가구, ‘밧곤을’에는 28가구가 살고 있었다. 조용하던 곤을동 마을은 4.3 당시인 1949년 1월 5일 국방경비대 제2연대 1개 소대가 이곳을 포위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곤을동 집 여기저기를 수색했다. 주민들을 한곳에 모이도록 한 다음, 젊은 사람 10여 명을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고, ‘안곤을’과 ‘가운뎃곤을’을 모두 불태웠다. 다음날에는 화북동 동쪽 바닷가인 모살불에서 주민 일부를 학살하고, 밧곤을도 불태웠다. 이날 밧곤을의 28세대의 가옥도 모두 불에 타 곤을동의 자취는 사라져버렸다. 67호의 마을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곤을동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은 주변 마을로 옮겨갔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현재 곤을동에 가면, ‘안곤을 마을’에 울담이 남아있다. 샛곤을은 밭터로 변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현재의 안곤을 마을 터는 당시 불타버린 집터의 울타리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올레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잃어버린 마을이 됐지만, 이곳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주소 : 제주시 화북일동 4440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

▶ 문의 : 064-740-6000

사람이 사람을 만날 수 없게 쌓은 <낙선동 4.3성>


낙선동 4.3성은 조천읍 선흘리에 있다. 1948년 11월부터 제주도 중산간 마을들이 토벌군에게 초토화되기 시작했다. 선흘리도 마을이 전소되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고, 재산 피해를 보았다.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토벌대는 작전계획에 세워 제주 곳곳에 성(成)을 쌓았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낙선동의 경우,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주민들은 겨우 함바집(임시 숙소) 안에서 잠만 잘 수 있었다. 일종의 수용소인 셈이다. 처음에는 50세대가 살다가, 이후에는 250세대가량의 주민이 살았다. 성터를 살펴보면 ‘해자’라는 팻말을 볼 수 있다. 약 500m에 달하는 성의 외각으로, 깊이 2m 정도의 도량을 파서 해자를 만들었다. 해자 안과 바깥쪽 성벽에 가시덤불을 놓아 무장대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제주 4.3과 다크 투어리즘의 흔적을 찾아서>


구덩이를 파는 일은 주민들의 몫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보초를 서는 경비 망루도 있었다. 밤마다 5명씩 배치되어 1명씩 교대하며 보초를 섰는데, 낮에 힘든 밭일을 마치고 야간경비를 서는 건 몹시 고단한 일이었다. 현재 낙선동 4.3성은 당시 일부를 복원한 것이다. 낙선동 4.3성 유적지 안내소가 있으니 이곳에서 해설을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 주소 : 제주시 조천읍 선흘서5길 7

▶ 문의 : 064-783-4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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