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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 <4.3 길을 따라 걷다 -서귀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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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4·3은 이렇게 정의된다. 하지만 4·3의 흔적들 앞에 서면 이런 정의조차 읊조리지 못할 만큼 참담하고 처연한 아픔만이 전해질 뿐이다. 학살을 온몸으로 껴안은 제주의 상흔을 돌아보며 4·3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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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4.3 길을 따라 걷다 -서귀포 지역-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4·3은 이렇게 정의된다. 하지만 4·3의 흔적들 앞에 서면 이런 정의조차 읊조리지 못할 만큼 참담하고 처연한 아픔만이 전해질 뿐이다. 학살을 온몸으로 껴안은 제주의 상흔을 돌아보며 4·3에 대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동광마을 사람들의 크고 넓은 은신처큰넓궤

화산섬인 제주는 4·3의 고통 속에서 사람들을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어 어미처럼 도민들을 품었다. 사람들은 제주 곳곳에 있는 용암동굴에 숨어 들어가 몸을 피했는데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위치한 큰넓궤는 동광마을 주민 120여명을 2달 동안 지켜주었다. 1948년 11월 15일 중산간마을을 향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되고 학살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동광주민들은 곶자왈에 숨어 살다가 큰넓궤를 발견하고 이 굴로 들어갔다.
큰넓궤는 길이가 180미터 정도 되는 용암동굴로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정도의 좁은 입구를 통과한 뒤 3m 정도의 절벽을 내려가면 안에 크고 넓은 공간이 형성돼 있다. 그곳에서 성인 남성 무릎 정도 높이의 낮은 굴 30미터 정도를 기어 통과하면 또다시 크고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숨어 지낼 수가 있었다. 아직도 동굴 안에는 그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그릇이 깨진 채 놓여있다.
큰넓궤는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머문지 40~50일 지난 뒤에 토벌대에 발견되었는데 내부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고춧가루와 이불 등을 태워 밖으로 연기를 내어 토벌대가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후에 주민들은 넓은궤 밖으로 나왔지만 한라산으로 들어가다가 토벌대에 총살되거나 잡혀가 정방폭포 등에서 학살됐다. 최근에는 큰넓궤에 숨어살던 마을 사람들을 소재로 한 영화 <지슬>이 제작되기도 했다. 현재는 입구가 막혀있어 굴에 들어갈 수는 없다.

제주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 <4.3 길을 따라 걷다 -서귀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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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검속된 주민의 생명을 앗아간 학살터섯알오름 학살터

크게 조용하다, 는 뜻의 대정은 아이러니하게도 큰 비명과 소음으로 얼룩지며 제주의 역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마을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알뜨르비행장은 일본 군용기가 드나드는 비행장이자 격납고로 사용되었고, 섯알오름은 4·3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총살되고 암매장당하는 비명의 언덕이 되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7-3번지 일대에 위치한 섯알오름은 송악산의 알오름으로 송악산 서쪽에 있는 오름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섯알오름을 파내어 탄약고로 사용하였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 미군이 폭파시켜 구덩이만 남았다. 이 때 생긴 구덩이가 예비검속 된 주민을 학살하는 총살장으로 활용된 것이다.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한림, 안덕, 대정면 관내에서 예비검속을 시행했고, 주민들은 이곳으로 끌려와 총살, 암매장 당했다. 언덕 위에서 총을 쏘면 총살된 사람들이 그대로 굴러 떨어져 구덩이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6년 뒤인 1956년에 시신 수습작업이 시작되었는데, 5월에 발견된 모슬포지역의 시신 149구는 수습된 뒤 사계리에 있는 백조일손묘역으로, 3월에 발견된 한림지역의 시신 62구는 수습된 뒤 한림읍의 만벵디묘역으로 옮겨졌다. 수습된 시신이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자손 한 사람 한 사람이 일백 할아버지를 모두 내 할아버지 모시듯 모시라’라는 뜻을 담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라는 비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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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을무등이왓

서귀포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무등이왓은 300년 전에 관의 침탈을 피해 숨어든 사람들이 만든 화전마을이었다. 목축을 하거나 농사, 수공예품을 만들고 살았으며 교육열이 높아 일제 강점기인 1939년에는 2년제 동광간이학교가 설립되어 안덕면 지역의 아동 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교육열이 높고 아름답던 마을은 4·3으로 초토화가 되었다. 무등이왓 초입에는 11월 15일에 마을로 들어온 토벌대가 양민 10여명을 학살한 최초학살터가 있다. 또 광신사숙(동광간이학교의 전신)이 있던 터, 마을 주민에게 소식을 알리던 공고판 자리 등이 보존되어 있다. 마을 위쪽에는 1948년 12월 12일, 전날 토벌대가 학살한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잠복했다가 10여명을 또 다시 학살한 잠복학살터도 있다.
130여호 정도가 살고 있던 큰 마을이었으나 1948년 11월 초토화 작전 이후 마을이 전소되어 현재는 마을터만 남아있다. 무성한 대나무숲과 팽나무, 돌담의 흔적, 황폐함만 남아 있어 4·3 사건이 어떠한 크기와 무게의 사건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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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4·3에 가까이 가다동광, 의귀, 가시마을 4·3길(서귀포 지역)

4·3이 제주와 제주 도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4·3길을 따라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서귀포시에는 안덕 동광마을, 남원 의귀마을, 표선 가시마을 등 세 개의 4·3길이 있다.
동광마을 4·3길에서는 동광리복지회관을 중심으로 무등이왓, 큰넓궤, 마을 주민들이 피난생활을 했던 도엣궤 등을 돌아볼 수 있다. 동광마을은 4·3 당시 토벌대에 끌려간 많은 주민들이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당했고, 시신들은 바다에 떠내려가 수장되거나 겹겹이 쌓여있었다고 전해진다.
남원 의귀마을은 다른 지역보다 토벌작전이 일찍 시작된 곳으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고, 행방불명되었다. 의귀마을 복지회관을 중심으로 집단학살 당한 뒤 흙만 대충 덮힌 채 시신이 방치되었던 의귀초등학교 동녘밭, 4·3 당시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이 묻힌 송령이골을 비롯해 현의합장묘, 남원 희생자 위령비 등을 둘러볼 수 있다.
표선 가시마을은 4·3당시 360여 호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나 폐허가 되었다. 4·3당시 마을 청년들이 보초를 서던 고야동산과 마두릿동산, 가시마을을 설촌한 청주한씨 가족의 묘인 한씨방묘, 4·3으로 사라진 마을 새가름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유의사항
※ 위 정보는 2018-03-29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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