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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 <4.3 길을 따라 걷다 -제주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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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0년 동안 4·3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꺼내지 못하는 어둠의 이야기였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또 먹먹함과 고통과 절망으로 싸여있던 4·3의 이야기는 생존한 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금씩 치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완전한 빛에 도달하기를 꿈꾸며, 4·3은 여전히 걷고 있다. 그리고 이 길은, 함께 걷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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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4.3 길을 따라 걷다 -제주시 지역-

지난 70년 동안 4·3은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꺼내지 못하는 어둠의 이야기였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또 먹먹함과 고통과 절망으로 싸여있던 4·3의 이야기는 생존한 사람들의 입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 순간부터 조금씩 치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길은 쉽지 않았지만 완전한 빛에 도달하기를 꿈꾸며, 4·3은 여전히 걷고 있다. 그리고 이 길은, 함께 걷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무명천으로 싸매어도 치유되지 않은 아픔진아영 할머니 삶터

4·3 당시 경찰의 총탄에 턱이 날아가 한 평생을 턱이 없이 살아온 여인. 썩고 짓이겨진 얼굴을 드러낼 수가 없어 평생 얼굴에 무명천을 여미고 살다 결국 죽음을 맞은 진아영 할머니의 삶터가 한림읍 월령리에 보존되어 있다. 월령리 지천에 보이는 선인장처럼 평생 찔리는 듯한 고통으로 산 할머니는 평생을 두려움에 떨며 방문을 열쇠로 꽁꽁 걸어 잠그며 살았다고 한다.
월령리 마을로 들어가면 무명천 할머니길이라고 쓰여진 벽화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에 할머니의 삶을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벽화를 그려놓았다. 그림은 할머니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듯 따뜻하고 정겹다.
마을 중간에 있는 초록색 지붕이 얹힌 집. 작은 마당을 통해 단출한 집으로 들어가면 거실과 부엌 역할을 하는 작은 공간이 나오고, 왼쪽에는 할머니의 방이 나온다. 방에는 할머니가 생전에 사용하던 옷과 소지품 등 대부분의 유품들이 제자리에 전시되어 있다. 또 중앙에 있는 TV에는 할머니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다. 방 한편에는 방문객들이 할머니에게 적어놓은 편지들도 가득하다. 현재 민간단체에서 보존회를 꾸려 관리하고 있다.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길 <4.3 길을 따라 걷다 -제주시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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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을 숨겨주었던 용암동굴빌레못굴

어음2리 706번지에 위치한 빌레못굴은 4·3 당시 어음, 납읍, 장전리 주민이 숨어있던 자연굴로 총 길이 11,749m나 되는 세계 최장의 용암동굴이다.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벌인 합동 수색작전에서 발견되었는데, 굴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동굴 입구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빌레못은 4·3 전에는 주민 몇몇 밖에 알지 못하는 굴이었다고 한다.
빌레못굴에 숨어있던 29명의 마을 주민들은 집단 총살당했는데 주로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토벌대는 남자 아이의 발을 잡고 휘둘러 돌에 메쳐 죽였다고 하며 이 아이의 어머니와 젖먹이 아이는 동굴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가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해 굶어 죽었다고 한다. 현재 굴은 개방되어 있지 않으며, 빌레못굴 입구 안내표석의 100여m 동남쪽 소나무 뒤로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던 학살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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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바닷가 마을곤을동

4.3 당시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이 어디였느냐에 따라 생사가 달라졌다. 1948년 10월, 해안선으로부터 5km 밖의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배로 간주한다는 포고령이 발표되면서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모두 해안지역으로 이주당했다. 그리고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태워 없애고, 죽여 없애고, 굶겨 없애는 민간인 대학살이 일어났는데 이 기간 동안 중산간 마을 95%가 전소되었다. 곤을동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무차별 학살을 당한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는데 해안마을이 전소되는 것은 드문 경우였다.
약 70여호로 구성된 곤을동 마을은 1949년 1월 4일 군인들에 의해 불탔고, 마을에서 골라낸 청년 20여명은 학살되었다. 하늘마저 시뻘겋게 불타며 마을은 전소되어 사라졌다. 현재 곤을동에는 마을이 있던 모습을 보여주는 조감도와 4.3 해원 상생 거욱대가 있어 이 황량한 곳이 한 때 마을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집과 집을 구분하던 울타리 담이었음을 알려주는 돌담과 무성하게 자란 수풀만이 처연하게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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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들의 집단 거주지낙선동 4․3 유적지

1948년 11월 20일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린 선흘리에서 살아남은 주민들이 동원되어 성을 쌓고 집단 거주를 시작한 곳.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목적으로 축성이 되었지만 이 성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주민들은 강제로 동원되어 한 달 동안 성을 쌓았는데 주위의 밭담이나 산담, 심지어 절구돌, 주춧돌 등을 쌓아 만든 성의 규모는 가로 150m, 세로 100m, 높이 3m, 폭 1m로 직사각형 형태였다. 성 안에는 지서, 학교, 마방, 함바촌 등이 정렬되어 있었고 성의 양 네 귀퉁이와 화장실 옆에 초소가, 외부에 총을 겨누기 위해 성벽 중간에 조그만 창을 내었다.
1949년 4월에 성이 완공되었고, 성안에 함바집을 짓고 살던 주민들은 통행증을 교부받아야 출입이 허락되었다. 남자들은 모두 사망하거나 한라산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에 성은 노약자와 여성들이 지켰고, 경찰들에게 부식을 공급하느라 힘든 시간을 겪기도 했다.
1956년에 통행제한이 풀리자 일부 주민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 집을 짓고 살았고, 나머지는 성안에 남아 현재의 낙선동이 되었다. 낙선동성은 4․3 당시 축조된 성 중에서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2008년 4․3 중요 유적지 복원사업으로 성담과 초소 등이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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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성금으로 4·3 추모공원영모원

항일운동가와 4․3 희생자, 한국전쟁에서 희생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하귀리 주민들에 의해 2003년 5월 조성된 곳이다. 4·3 기간 동안 조천과 하귀 두 마을이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입었는데 하귀리에서는 32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애월읍 하귀리는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할 정도로 역사의식이 남달라, 영모원 조성 계획을 세우고 마을을 중심으로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이후 하귀 출신 인사들과 재일동포들의 성금까지 보태져 마을이 자립적으로 조성한 4·3 추모공원이 되었다.
영모원의 조성 배경과 과정은 다른 마을에도 영향을 준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무장대에 희생된 군경과 토벌대에 희생된 주민들을 한 곳에서 모셔 추모함으로 화해와 상생의 대표적인 표본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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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정보는 2018-03-28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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