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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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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전에 그 너머에 있는 제주 4·3의 아픔을 들여다 보자. 지난 60여년 제주가 간직해야 했던 이 아픔을 알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운 제주에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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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통해 찾는 평화 · 상생의 메시지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1948년 4월, 제주를 내려다보는 한라산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여느 해처럼 생을 머리에 인 제주 사람들의 발걸음이 곳곳에 자국을 남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 손놀림이 제주 역사의 한 시절을 엮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이들의 일상을 감싼 공포와 적막. 그렇게 4월은 제주의 아픔으로 수놓아져 버렸다. 제주 4•3은 보통 “1947년 3월 1일을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봉기 사태와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위키백과)으로 정의된다. 당시 제주 전체 인구의 10%가량인 3만 명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공식으로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한 희생자만 해도 약 1만 5000명에 다다른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을 단지 수치만으로 따질 수는 없다. 삶의 터전이 잿더미가 되어도, 눈 앞에서 사랑하는 이의 생이 끊어지는 것을 목도해도 목놓아 울 수조차 없는 현실. 내 품 속도 두려워한 아들은 외가로, 다른 아들은 친가로 흩어 보내 자손이라도 남기려는 부모들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렇듯 제주는 비극 속에서 허덕였고, 그 처절함은 섬의 무의식 속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제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기 전, 그 너머에 있는 제주 4.3을 들여다보자. 지난 60여 년 제주가 간직해야 했던 이 아픔을 알게 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리만큼 아름다운 제주에 경이를 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묵묵히 제주를 바라보고 있는 한라산의 시선을 보며, 담담히 아픔을 이겨내야 했던 사람들의 깊은 심정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4·3을 향한 제주인의 위로제주4·3평화공원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싣고 온 어르신 한 분의 시선이 한 곳만을 계속 응시한다. 영문도 모른 채 4·3이라는 광풍에 희생되어야 했던 남편. 이제는 보고싶어도 검은 돌 위 새겨진 이름 석자로만 만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희생자들을 향한 날 선 시선에 숨죽였던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기구한 이야기 1만 4000개, 검고 차가운 돌에 새겨져 4·3 평화공원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4·3 평화공원은 지난 60여 년 간 해원 되지 못한 4·3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재현하여 평화와 인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359,380㎡의 너른 땅에 위령제단, 위패봉안실, 추모광장, 봉안관, 각명 비원, 행방불명자 비원, 초대광장을 설치해 놓고, 4·3을 찾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공원 내에는 4·3 평화기념관도 있다. 11,455㎡ 면적에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진 이 기념관은 주로 전시를 통해 4·3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을 따로 두고 있으며 다양한 도서를 비치해 놓은 도서자료실도 설치해 4·3을 상세히 전한다. 또한 영상관에서는 4·3에 대한 영상을 상영하는 동시에, 4·3과 관련된 여러 학술대회 등을 개최함으로써 4·3을 현대의 기억 속에 새기고 있다. 들어서자마자 감도는 엄숙한 분위기. 공원 안 설치된 모녀상을 보며 울컥하기도 잠시, 공원을 내리쬐는 햇빛에 사람들은 금세 아늑함을 느낀다. 결코 4·3의 아픔이 영원히 제주를 잠식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듯, 저 볕은 밝고 따스하기만 하다. 그렇다. 처절했던 4·3, 이를 어둠 속에 가두고 잊는다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점차 희미해지는 기억 속 묻어둔 이 역사를 수없이 드러내고, 되뇌어야 한다. 4·3의 아픔을 평화의 시선으로 어루만질 때 그 상처는 진정 아름다운 새 살로 돋아날 것이다.


상생 • 평화 • 번영을 향한 소망너븐숭이 4·3기념관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명절도 아닌데, 고소한 기름 냄새가 북촌 온 마을에 진동한다. 이 집 저 집을 오가며 신이 난 아이들, 분주한 마을 사람들. 마을 축제일까? 그러나 마을 안 사정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음력 12월 19일(1949년 1월 17일), 이 날은 내 아버지, 시아버지, 이웃집 삼촌의 제삿날이다. 한 마을에서 400여 명이 한순간에 생을 달리했다.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총과 죽창에 목숨이 끊어졌다. 학살 사건이 있기 전 마을 어귀에서 군경과 산사람들의 충돌로 군인 2명이 목숨을 잃긴 했다. 그런데 군경의 분노는 애꿎은 마을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군경들은 마을 사람들을 북촌국민학교에 모아놓고, 너븐숭이와 당팟으로 차례대로 끌고 가 총을 쐈다. 그것도 모자라 대창으로 찌르며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참혹한 죽음을 어머니는, 아내는, 아들은, 딸은 뒤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 날의 사무침은 너무나도 잊고 싶은, 차마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북촌리 사람들의 뇌리 속 자리하고 있다.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북촌에 자리한 ‘너븐숭이 기념관’이다. ‘널찍한 돌밭’을 뜻하는 너븐숭이, 자연이 만든 이 너른 공간은 감히 사람에 의해 끔찍한 학살터가 되어 버렸다.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60여 년 전, 마을이 겪어야 했던 그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너븐숭이 기념관은 지상 1층 294㎡의 규모 속 4·3의 서글픔을 가득 채워놓고 있다. 북촌리 4·3 전시관, 영상실, 묵상의 방 등으로 공간을 구성해 당시의 비극을 어렴풋이나마 재현해 놓고 있다. 북촌마을이 불길로 휩싸였던 그 날의 아픔은 전시관 밖 위령성지에도 표현되어 있다. 바닥에 눕혀져 서로 겹쳐 있는 비석들, 그날 스러졌던 희생자들의 상징이다. 그 가운데 우뚝 솟은 순이삼촌 문학비, 누구도 입 밖에 꺼낼 수 없었던 4·3을 글로써 드러낸 한 작가의 용기이다. 성지 곳곳 솟아있는 작은 흙무더기, 그날 생을 달리 한 꽃 같은 아기들이 임시 매장된 슬픔의 흔적이다. 저 멀리 바다를 향해 있는 방사탑, 4·3의 액운을 씻음과 동시에 앞으로 이 같은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바라는 마음이 쌓아 올린 정성이다. 결국 이 너븐숭이 기념관은 방문한 이들에게 제주 4·3의 과제를 부여한다. 그 답도 방사탑에 친절히 새겨놓았다. ‘상생•평화•번영’. 이제 이를 완성해, 4·3 희생자들의 원을 푸는 과정은 우리에게 달렸다.


달빛 고운 오름이 품은 죽음다랑쉬오름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자태도 곱다, 저 오름. 가지런한 능선이 마치 어미의 치마폭 같다. 치맛자락에 폭 감싸이듯 오르는 길. 정상에 올라 마주하는 분화구는 내 마음 담길 듯 보드랍게 파여 있다. 그 옛날 제주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 도드라진 꼭대기를 손으로 탁 친 것이 그 이유란다. 이름 또한 곱다. 오름 위로 쟁반같이 뜨는 달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지은 이름 ‘다랑쉬’. 제주식으로는 ‘다랑쉬’지만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지닌 ‘달수리,’ 한자식으로는 ‘월랑봉(月郞峰)’으로 불리기도 한다. 송당리와 세화리 사이에 걸쳐 솟아있는 다랑쉬 오름. 382.4m라는, 한라산에 비해서는 턱없이 낮은 높이지만, 제주 사람들에게는 ‘오름의 여왕’이라 불린다. 그만큼이나 우아하고, 민초들에게는 더없이 정다운 오름. 그러나 이 오름 또한 4·3으로 인한 아픈 상처를 품고 있다. 포근한 오름 아래 마을을 이뤄,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던 20여 가구의 사람들. 그러나 4·3은 이 평화로움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군경과 토벌대가 다랑쉬 마을을 초토화시켰고, 살기 위해 몇몇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오름으로 향한다. 입구 직경이 60~70~㎝로 기어 들어가야 할 만큼 좁지만, 그래서 더욱 몸을 숨길 수 있는 자연 동굴에서 먹고, 자는 피난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나 굴 주변 떨어진 인분으로 인해 이 피난처가 발견됐고, 잔인한 사람들은 굴 양쪽 입구에서 동시에 불을 지핀다. 나와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 뻔한 결말 속, 피난민들은 전부 질식사해 버린다.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이 슬픈 이야기는 1992년, 4·3 사건이 일어난 지 44년 만에 굴 속 주검이 발견되면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당시 시신은 모두 11 구였는데, 어린이, 여인들이 포함된, 말 그대로 민간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신은 도민들이 그 아픔을 깊이 애도할 새도 없이 화장되어 바다에 뿌려진다. 이해할 수 없는 무고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 그러나 어미와도 같았던 다랑쉬 오름은 이를 품고 지켜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오름은 지난 세월 묻혀있던 그 죽음을 40년간 지켜만 봐야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름은 변함없이 고고했고, 쉼 없이 아름다웠다. 아마도 지난 그 시절, 다랑쉬 오름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마을 사람들의 평화로웠던 시절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픈 마음이 아니었을까. 다랑쉬 오름은 오늘도 마을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을 담아, 자신의 품 가득 고운 들꽃을 피워내고 있다.


백 할아버지께 드리는 한 자손의 약속백조일손묘역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백조일손(百祖一孫)’. 백 할아버지 한 자손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좋은 의미인가. 무언가 우리라는 공동체성을 더욱 견고히 해주는 귀한 말 같다. 그러나 이 명칭은 제주의 아픈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한스런 명칭이다. 제주에 끼얹어진 4·3이라는 먹물이 새겨 넣은 가슴 아픈 이름이다. 4·3의 광풍이 훑고 간 제주,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삶터를 다시 일굴 힘이 없었다. 황망히 떠나간 이들의 죽음을 슬퍼할 여력도 없었다. 그리고 턱 막힌 숨을 미처 내쉬기도 전에 터진 6.25 전쟁. 이 전쟁이 다시 4·3이라는 악몽을 되살릴 줄 제주사람들은 꿈에나 알았을까. 6.25 전쟁이 시작되자 제주에서는 예비 검속이 진행된다. ‘4·3 때 가족이 희생됐다’, ‘사상이 의심스럽다’, ‘군경의 일에 비협조적이다’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은 여지없이 끌려갔다. 그렇게 끌려간 이가 3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7월 29일, 8월 4일, 8월 20일 서귀포, 제주항 앞바다, 제주읍 비행장, 섯알오름 등지에서 집단 수장 또는 총살 후 암매장당한다. 예비 검속자 학살은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있었던 250여 명 학살 장면은 우연히 주민들에 의해 발각된다.

그러나 삼엄한 감시로 그 시신은 바로 수습되지 못하고 6년 후에야 이뤄진다. 1957년 4월, 대정 유가족들이 유골을 수습하러 이 터에 모인다. 그러나 수습한 유골이 서로 엉켜 있어 누가 자신의 가족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결국 함께 묘를 만들어 안장하기로 결정하고 안덕면 사계리에 부지를 마련한다. 이렇게 조성된 묘역에 안장된 시신은 모두 132구. 이백여 명의 할아버지를 구분 않고 대대손손 모시고자 유가족들은 성금을 모아 비를 세우는 데 그것이 바로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이다. 단순히 시대의 아픔이라 논하기에 제주 4·3은 한없이 처절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제주 사람들은 십 수년간 이 고통을 토해내지 못한 채 속에 담고 삭혀야만 했다. 그렇다고 쉬이 사그라들 아픔이 아니었다. 제주사람들의 속 깊은 곳까지 뿌리내렸던 그 기억은 이제 대지를 뚫고 나와 줄기를 뻗어 내렸다. 이제 그 줄기는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고자 한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절망을 몸소 겪어낸 사람들이 그토록 바랐던 ‘평화’, 그리고 이 모든 고통을 함께 이겨내고 살아가겠다는 ‘상생’의 정신. ‘희망’, ‘평화’, ‘상생’으로 영그는 이 열매를 우리 한 자손들이 백 할아버지께 올려드릴 그 날을 함께 그려보자.


아픔 품고도 저토록 고운 벌판만벵듸 마을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제주의 자연을 바라보며 제주의 역사 또한 함께 둘러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곳이 제주에는 많다. 한림지역 역시 그렇다. 특히 제주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광경들이 한림 곳곳에 널려있다. 특히 ‘만벵듸 마을’은 제주 4·3의 역사가 묻어나는 장소이다. 백소일손지묘처럼 1950년 8월 20일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이들을 모신 터가 이 곳에 있다. 그 당시 한림 사람 63명이 희생당했는데, 46위가 만벵듸에 있는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나머지 132구는 백조일손지묘에 모셔져 있다. 만벵듸 묘역으로 바로 향하는 것도 좋지만, 한림에 있는 관련 유적지들을 차근차근 둘러보는 것도 좋다. 한림 어업 창고터, 한림지서터, 서청 주둔지 등 당시의 아픔이 스며있는 건물들이 주변 일대에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제주의 아픔  <제주 4·3의 현장을 찾아서>


한림매일시장 입구 왼편을 바라보면 한림 어업 창고 터가 있는데, 당시 사람들을 집단으로 구금했던 장소이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이어 시장을 통해 한림파출소로 향하면 또다시 역사의 현장이 펼쳐진다. 파출소는 일제시대 때부터 이어져 온 한림지서 터 바로 그 자리에 있다. 바로 그 맞은편에는 서북청년단이 주둔해 있던 한림여관 터도 남아 있으며, 그 일대 한림초등학교 또한 1914년 보명의숙으로 개설되면서부터 제주 근현대를 몸소 겪어 온 역사의 흔적이다. 우리의 목적지인 만벵듸 묘역은 금악리 갯거리오름 남쪽에 위치해 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위령비 뒤로 묘역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보인다. 당시 희생자들이 모셔져 있는 터다. 한림 지역 유족들 또한 학살 사실을 알고 바로 시신을 수습하러 가지만, 군인들이 출동해 이를 저지한다. 이후 군인들이 학살터에 민간인이 접근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유족들은 1956년 3월에 이르러서야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것도 비밀리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대 기억하는가 섣알오름 듣도 보도 못한 골짜기/ 모진 광풍에 스러지던 날 칠석날 새벽/ 보모 형제 임종 지키지 못한 불효/ 천 년을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만벵듸 묘지 위령비에는 강덕환이 지은 조시가 새겨져 있다. 조용히 읊어만 봐도, 당시 4.3의 모진 광풍에 스러져 간 희생자들의 절절함이 울리는 듯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는 읊는 입으로 하여금 평화를 노래하게 한다. “가진 것 비롯 적어도/ 더불어 사는 넉넉함으로/ 평화의 불씨 당겨 점화하오니/ 해원의 향으로 타오르십서/ 상생의 촛농으로 흘러 내리십서” 이 시 속에 녹아있는 평화를 향한 염원, 더불어 살아가는 상생의 염원, 땅 속 묻힌 이들은 얼마나 꿈꿨을까. 그 옛날에도 저토록 고왔을 금악의 저 벌판은, 서글픈 세월이 지나간 지금도 여전히 곱기만 하다. 영겁의 세월, 차가운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다소곳한 저 들꽃처럼 이들의 희생도 언제나 평화의 상징으로 피어날 그 날이 올까.


 

유의사항
※ 위 정보는 2017-01-01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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