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명장이였던 최영(1316~1388) 장군의 사당이다.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에는 제주목사가 죽임을 당하는 등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 공민왕 23년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원정을 가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추자도로 대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최영 장군은 주민들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어 생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부터 주민들은 장군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사당을 지어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음력 12월 말일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지내고 있다.
고려 공민왕 때 제주도에는 제주목사가 죽임을 당하는 등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따라서 조정에서 공민왕 23년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원정을 가는 도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추자도로 대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최영 장군은 주민들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어 생활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부터 주민들은 장군의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고 사당을 지어 해마다 음력 7월 15일과 음력 12월 말일에 풍어와 풍농을 빌며 제사지내고 있다.
《 고려 공민왕 23년(1374, 탐라현 제주도)에서 원(元)의 목호, 석질리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하였다. 장군은 원정 도중 심한 풍랑으로 이곳 점산곶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들에게 어망편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하며 매년 봄.가을에 봉향하고 있다. 》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해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74년 사당 단청 및 담장을 보수함으로써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