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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투어 마을참견 5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강은영 삼촌의 송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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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거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일주도로를 건너면 송산동이다. 20세기 초, 서귀포항 개발과 함께 성장한 이곳은 1980년대 제주의 ‘명동’이었다. 골목마다 지난 시대의 흔적이 어린 서귀포의 심장부로 특별한 시간 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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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 번째 마을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강은영 삼촌의 송산 마을
이중섭거리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일주도로를 건너면 송산동이다. 20세기 초, 서귀포항 개발과 함께 성장한 이곳은 1960년대 제주의 ‘명동’이었다. 골목마다 지난 시대의 흔적이 어린 서귀포의 심장부로 특별한 시간 여행을 떠난다.
강은영 삼촌에게 송산동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6·25 전쟁이 나던 해 출근길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 이야기부터 꺼낸다. 4·3 때 집이 불타는 바람에 화가 이중섭이 서귀포 피란 시절 머물렀다는 단칸방보다도 좁은 방에서 대가족이 지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출근 날 울던 까마귀 소리까지 기억하는 강은영 삼촌은 어릴 적 동네 모습 또한 세세히 기억해냈다. 이곳은 친구 아무개의 집이었고, 저곳 호텔이 있는 자리는 동네 제일가던 부자가 살았으며, 학교 가는 골목길은 저리로 나 있었다는 삼촌은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시절 풍경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수필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삼촌에게 송산 마을은 ‘꿈에도 잊히지 않는 그곳’이다. 아버지와 유년, 마을은 모두 창작의 원천으로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삼촌의 기억을 좇아 마을을 둘러보러 나서는 길에 서귀포 원도심의 역사‧문화 자원을 아카이빙하고 있는 박정호 삼촌이 동행해 설명을 보탰다. 2019년 요즘의 원도심을 걷는 잠시 동안, 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흔히 서귀포 원도심이라고 부르고 있어서인지 ‘송산동’이란 이름은 어쩐지 낯선데요. 오래된 이름인가요?
박정호(이하 박) 해방 이후에 쓰인 이름이에요. 그 전에는 서귀리, 서귀면, 서귀읍 등 ‘서귀’가 들어간 명칭을 썼죠. 송산의 뜻이 두 가지예요.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 시설인 서귀진이 이곳에 있었는데, 군사 시설이니 활터가 있잖아요. 활을 쏘는 과녁인 ‘솔대’에서 송산이 나왔다고도 하고, ‘소나무가 많은 동산’이라 송산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옛 지명에 ‘서귀’를 쓸 정도라면, 송산 마을이 서귀포의 핵심 지역이었겠구나 싶어요.
박 조선시대만 해도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20세기 초에 핵심 지역으로 성장했어요. 이 근방의 오래된 중심지는 송산동보다 좀 더 중산간 지역입니다. 현재 동홍동‧서홍동으로 나뉜 ‘홍로현’이지요. 19세기 말부터 포구를 통해 일본인이 드나들며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권이 형성되고 신문물과 자본이 유입되며 번성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의 새섬 넘어가는 길목의 주차장 있죠? 거기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고래 공장이 있었어요. 1년에 20~30두까지 잡았는데, 고래를 잡으면 그 앞이 피바다가 돼서 어장이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서귀포항에서 오사카로 가는 정기선이 생긴 건 1927년일 거예요. 당시 일본은 1차 대전 이후 최대 활황기를 맞게 되는데, 이때 서귀, 토평, 법환 등지의 인력이 일본으로 많이 넘어갔죠. 적산가옥은 물론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여관도 무척 많았어요.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주시 다음 가는 제2의 도시로 발전한 거예요.
1960년대에는 제주의 명동이라 불렸다지요.
박 지금 송산동 인구가 1000명 정도인데, 최고점을 찍은 1980년대에 8000명이었어요. 상주인구가 8배 많았으니 거리가 얼마나 붐비고 활기찼을지 상상이 가시죠. 선생님, 그때 생각나세요?
강은영(이하 강) 그럼요. 지금은 이중섭거리랑 서귀포매일올레시장 있는 윗동네가 사람이 많지만, 옛날엔 가파른 동산이라 인적이 드물었어요. 이중섭미술관 생기고 관광지로 이름이 난 거지, 원래는 우리 아랫마을(송산동)이 최고 번화가였어요. 가게가 많아서 놀 때는 모두 이리 모였을 만큼 잘 나갔죠. 터가 좁으니까 언젠가부터 관공서가 서쪽으로 옮겨가고 세를 잃었지만.

강은영 삼촌은 송산동 토박이지요?
강은영 저는 1942년에 송산동에서 태어났어요. ‘안거리 밖거리’라고 솔동산로에 음식점이 있는데, 그 옆 2층집이 우리 집이에요. 원래는 다다미가 깔린 적산가옥이었는데, 4‧3 때 불타서 나중에 새로 지었죠.
박 강은영 선생님 집이 불 탄 게 아마 1948년 11월일 거예요. 당시 송산동은 서귀포시 중심지라 관공서가 모여 있었어요. 경찰이나 서북청년단도 많아서 이곳을 중심으로 좌익 무장대 토벌을 했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장대가 1948년 11월에 대대적인 습격을 감행했죠. 그때 피해를 보신 것 같아요.
송산 마을도 4‧3 피해가 심했나요?
강 소남머리라고 소낭(소나무의 제주어)이 많이 있는 해안가 언덕이 있는데, 거기서 사람 많이 죽였어요. 그 아래 바다에 시체가 가득했다고 해요. 이제라도 위령비 같은 걸 꼭 세우면 좋겠어. 우리 아버지도 난리 통에 돌아가셨죠. 정치적 성향으로 따지면 우익이었는데, 무장대가 아니라 토벌대가 끌고 갔어요. 소 몇 마리, 고사리 몇 근 주민들에게 징발해오라고 한 것을 면장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거부했거든요.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가 출근하려고 준비하는데, 까마귀가 그렇게 울더래요. “왜 저렇게 까마귀가 울어대지?” 하면서 나가서는 영영 못 돌아오셨어요.
박정호 삼촌은 송산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마을 아카이빙 작업을 시작하게 됐나요?
박 송산동은 근대 초기에 형성된 도심이잖아요. 적산가옥과 같이 시대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고요. 이러한 마을 풍경이 저의 유년기와 연결되어 향수를 자극했던 것 같아요. 제가 자란 남산의 회현동도 그런 마을이었거든요. 군산 같은 도시에 가면 옛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서귀포 원도심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은 지역임에도 너무 많이 변해버렸어요. 강은영 선생님 같은 토박이 삼촌과 골목골목 다니며 인터뷰하고, 자료를 뒤져보면서 지금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아카이빙해서 잘 남겨 놓고 싶어요.

송산 마을의 매력을 하나만 꼽는다면요?
박 저는 여행 프로그램 만들던 PD이자 여행 작가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잖아요. 근데도 서귀포항만큼 아름다운 항구는 본 적이 없어요. 제주 풍토사를 지은 일본인 저자 역시 이곳은 다른 항구와 다르다고 했어요. 언덕이 오소록하게 항구를 감싸고, 천지연폭포에서 떨어진 민물이 흘러들고, 난대림이 무성하고… 참 아름답습니다. 이중섭 화백은 서귀포에 11개월간 살았지만, 서귀포를 소재로 수많은 작품을 남겼잖아요. 이유가 있는 거죠.
강 그렇다니까요. 제가 병원에 입원하느라 육지에 있을 때 서귀포 앞바다가 보고 싶어서 미치겠는 거예요. 수평선이 멀리 있고 새섬, 문섬, 범섬이 떠 있는 그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서 울어지더라고요. 우리 형제들이 다 서울에서 대학 나왔거든요. 잘 돼서 지금은 송산동을 떠났어요.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나도 떠났을 텐데, 하는 맘이 들다가도 여기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어요. 떠나서는 못 살 테니까요.



➊ 솔동산로
“제주의 명동이라 불리던 1960년대, 송산동의 최대 번화가는 솔동산로였습니다. 길을 넓히면서 동쪽의 집들을 밀어버려서 옛 모습은 잃었지만, 골목골목 다니다 보면 적산가옥처럼 오래된 주택이 아직 남아 있어요. 목조 건물에, 일본식으로 달아낸 현관이 있으면 적산가옥일 확률이 높아요. 하지만 개인이 살고 있는 집이니, 집주인에게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건물 외부를 구경하세요.” -박정호 삼촌

➋ 서귀진성
“서귀포의 시작이죠.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시설인 3성 9진 중 이 지역 방어를 담당했던 유적이고요. 원래는 더 위쪽에 지었던 것을 16세기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왔어요. 서귀진성이 폐지된 후 관아 건물이 남아 있어 학교나 관공서 등으로 사용했다는데, 지금은 터만 복원해둔 상태예요. 성에 주둔하는 병사를 위해 수로와 우물을 만들어 이 주변에서는 논농사가 가능했어요. 과거에는 모두 논이었다고 합니다.” -박정호 삼촌

➌ 할망당
“서귀포항을 드나들던 어부와 해녀가 안녕을 기원하던 장소예요. 어부들이 배를 타고 먼 곳으로 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 할머니에게 찾아와 배를 지켜달라고 빌었다고 해요. 천지연폭포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보이면 돌을 얹고 할머니께 소원을 빌어보면 어떨까요.” -박정호 삼촌

➍ 천지연폭포&새섬
“천지연폭포와 새섬을 감상할 때 알아두면 좋을 정보를 드릴게요. 천지연폭포에는 1940년대에 지은 수력발전소가 있었어요. 한림의 화력발전소가 생기기 전까지 서귀포 지역에 전기를 공급했는데,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새섬 주차장 자리는 1920년대 일본포경주식회사가 지은 고래 공장이 있었답니다.” -박정호 삼촌


➎ 자구리물‧소남머리물
“둘 다 물이 나던 곳으로, 마을의 식수원이었죠. 가장 위의 물에서는 먹는 물을 길어오고, 아래서는 채소를 씻었어요. 그 아래에선 빨래하고, 더 아랫물에서는 수영하고 놀았지요. 4·3 학살터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는 아버지가 행방불명되고서 어머니와 이곳에 와서 아버지 혼을 부르는 제사를 치렀던 기억이 나네요.” -강은영 삼촌

➏ 남영호 위령비
“서복기념관 안쪽으로 들어와 산책로를 걷다 보면 큰 비석이 하나 보일 거예요. ‘남영호 사건’이라고, 박정희 시대에 발생한 일이에요. 1970년 12월, 서귀포항을 떠나 성산항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배 ‘남영호’가 규정을 위반한 과적으로 결국 여수 앞바다에서 침몰했어요. 기상 악화로 4일간 배가 뜨지 못하다 뜬 첫 배라 사람도, 화물도 너무 많이 실었던 거죠. 그 일로 319명이 죽었는데, 정권에 피해가 갈까 봐 제대로 된 조사 없이 쉬쉬한 것은 물론 책임자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국내 사상 최대의 해양 조난 사고인데, 언론 보도를 통제한 탓에 모르는 사람이 많아 꼭 소개하고 싶었어요. 세월호와 비슷한 점이 많은 사고죠. 서복전시관이나 정방폭포에 오면 꼭 들러보세요.” -박정호 삼촌
- 유의사항
- ※ 위 정보는 2019-08-05 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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