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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투어 마을참견 3 <인재 많은 마을에 이야기도 많아라 김범진 삼촌의 거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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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옛것이 쓸려가고 새것이 생겨나는 도시에도 오래된 마을이 있다. 화북공업단지 옆 거로 마을은 4·3 때 마을 전체가 불탔고, 1980년대에는 큰 도로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두 동강났다. 전해 오는 옛 이야기가 전설로 느껴질 만큼 세월이 지났고, 마을은 건재하다. 아마도 마을의 내력을 이어가려는 이들이 있어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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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마을인재 많은 마을에 이야기도 많아라, 김범진 삼촌의 거로 마을
하루가 다르게 옛것이 쓸려가고 새것이 생겨나는 도시에도 오래된 마을이 있다. 화북공업단지 옆 거로 마을은 4·3 때 마을 전체가 불탔고, 1980년대에는 큰 도로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두 동강났다. 전해 오는 옛 이야기가 전설로 느껴질 만큼 세월이 지났고, 마을은 건재하다. 아마도 마을의 내력을 이어가려는 이들이 있어서일 게다.
‘거로 마을’은 지도에는 나오지 않는다. 고려 중기부터 내려온 이름이지만, 행정상으로는 옆 동네까지 다 합쳐 ‘화북2동’이다. 다른 마을이라면 동네 토박이들만 쓰는 옛 지명일 테지만, ‘거로’라는 글자는 살아남았다. 그 이름 아래 모여 살던 이들의 기억을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기록하는 두 삼촌 덕분이다. 거로 마을에서 ‘문화공간 양’을 운영하는 김범진 관장과 김연주 기획자는 마을과 주민들의 기억을 소재로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한다. 동네 어르신과 수개월에 걸쳐 마을 곳곳을 답사하고 그림 지도를 만들고, 마을의 일상을 담은 웹툰을 연재하며, 문화공간 양에 머무는 예술가들이 거로 마을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할 수 있게 도왔다. 4·3으로 마을 전체가 불타는 바람에 공식 문서 한 장 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마을에는 여전히 이야기가 흐른다. 조선시대 관직에 진출하거나 학식으로 이름을 얻은 인물이 많은 거로 마을은 대대로 인재 나는 터로 유명했다는 것과 전통이 근대까지 이어져 마을 공회당에 학습당을 열었던 이야기, 4·3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함께 재건한 기억, 무더운 여름날이면 폭낭 아래서 진행했던 마을 회의의 추억 등. 그동안 두 삼춘이 수집했다는 생생한 거로 마을 이야기를 들으러 문화공간 양을 찾았다.

행정상으로는 화북2동이지요. ‘거로’라는 이름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김범진(이하 진) 행정 이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마을은 자연 마을이라고 하지요. 옛날부터 화북2동의 화북천 옆 마을을 ‘거로’라고 불렀는데요. 설촌 연대는 고려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무렵의 기록에 거로라는 이름이 나와요. 원래는 ‘클 거(巨)’에 ‘길 로(路)’를 써서 ‘큰 길이 난 지경’이란 뜻이었어요. 그러다 조선시대에 관리와 유학자를 많이 배출하며, 학덕이 높은 원로가 많이 사는 마을이란 의미로 ‘어른 로(老)’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1800년대쯤이네요.
인재가 많아 이름난 마을이군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진 제주의 양반 마을 하면 제1은 거로, 제2는 광령, 제3은 납읍이라고 했어요. 제주에서 제일가는 인재 마을이었지요. 비결이라면 아무래도 관덕정과 화북포구 사이라는 마을 입지의 덕을 본 것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지금은 제주항이 생겼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화북항과 조천항이 제주의 최대 항구였거든요. 제주 목사는 물론 추사 김정희처럼 유배 온 전직 관리나 학자, 온갖 신문물이 모두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로 들어왔어요. 사람, 지식, 물자가 드나드는 입구였던 거죠. 여기에 더해 화북은 제주 목의 중심인 관덕정과 가깝습니다. 관덕정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리면 광령, 납읍은 워낙 멀어서 마을 사람 한두 명밖에 갈 수 없거든요. 거로는 걸어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예요. 수십 명씩 회의에 참석하니까 “제주 목에는 거로 사람밖에 없나?” 하는 말이 나왔던 거죠.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퇴직한 관리들이 주로 거로 마을에 살았습니다.
두 분은 거로 토박이인가요?
김연주(이하 주) 저는 서울에서 공공 미술 분야의 기획 일을 하다가 김범진 관장과 ‘문화공간 양’을 꾸리기 위해 2013년 제주로 내려왔어요. 거로살이 7년차입니다.
진 거로에서 태어난 토박이까지는 아니지만, 대대로 외가가 거로에 있어서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놀았어요. 방학하면 부모님은 저를 외할머니 댁에 맡겨두었죠. 지금 문화공간 양이 바로 외할머니 집이에요. 여기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있는 폭낭을 보셨나요? 그 자리가 ‘바람길’로 통해서 여름날에 나무 그늘에 앉으면 참 시원해요. 날이 무더울 때는 폭낭 아래서 마을 회의를 했다고 해요. 회의를 마치면 사람들은 할머니 댁으로 내려왔어요. 그러면 할머니는 술을 내오고, 저는 여러 어르신 앞에서 노래를 불러드렸죠. 음주에는 가무가 필요하잖아요. 어른들이 용돈을 쥐어 주던 기억이 나네요.
주 조선시대에 인재가 많이 났던 마을이 거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관장님 댁은 특히 유명했어요. 삼형제가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서 셋이 함께 급제한 일이 있었거든요. 우당도서관 마당에 삼형제를 키운 어머니에 대한 비석이 남아 있어요.


문화공간 양에서는 거로 마을을 소재로 한 문화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하고 있지요?
진 일종의 아카이빙 작업인데요. 거로 마을 역사에는 몇 개의 단절선이 있습니다. 우선 4·3으로 마을이 전부 불타버린 일이 있는데, 그때가 바로 1949년 1월 7일입니다. 갑자기 마을을 불태울 것이니 피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살림 하나도 챙길 새 없이 마을이 사라졌어요. 남김없이 타버려서 마을 사람들이 돌아왔을 때 원래 살던 집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해요. 1980년대에 지금의 연삼로에 해당하는 산업 도로가 생겼고, 이 길이 그야말로 마을을 관통했습니다. 길을 내기 위해 김·현·양 씨 종갓집과 마을 공회당을 밀었고, 하나의 구역이었던 거로 마을은 갈래갈래 쪼개졌죠. 공간이 나뉘었고, 마을의 주민들 역시 나뉘게 되었어요.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마을의 양영선 어르신은 20년에 걸쳐 ‘거로 마을지’를 만들었어요. 저희 역시 문화‧예술을 매개로 마을이 가진 고유한 이야기에 닿고,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의미를 이웃과 후대에 전달하는 거지요.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주 예를 들어 ‘마을지’는 객관적인 사실과 자료에 근거하잖아요. 저희는 주관적인 기억을 담고 싶어요. 예술가들과 협업해 마을 어르신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듣고 수집하는 건 그 때문이에요. 마을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을 사실에 비추어서 맞다, 틀리다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조각으로 모으는 거죠. 공동체는 기억을 통해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공간은 바뀌고 사람이 드나들어도 공동체의 내력이 이야기로 공유된다면 끊이지 않고 흘러갈 수 있어요. 어르신들이 하나둘 떠나고 새로운 주민이 공간을 채워도 거로 마을이 이어질 수 있도록 문화공간 양은 ‘기억의 저장소’ 역할을 하려고 해요.
거로 마을 여행자를 위한 팁을 준다면요?
진 마을을 하나의 공간으로 본다면 거로 마을은 남은 것보다 사라진 것이 더 많은 마을이에요. 4·3으로 옛 모습과 기록이 모두 삭제됐고, 그나마 재건하고 복원한 것이 산업 도로가 놓이면서 대부분 사라졌죠. 그럼에도 면면히 흐르는 학식 깊은 마을의 저력 같은 게 있습니다. 4·3과 전쟁의 폐허 위에서 마을 청년들은 스스로 연극단을 조직했어요. 어르신들은 공회당에서 학습당을 열었고, 아이와 여성을 가르쳤죠. 마을의 주민들은 문화‧예술 활동으로 마을의 위기를 이겨내려 한 것이죠. 연삼로변의 CU 거로마을점은 예전의 마을 공회당 자리예요. 마을을 거닐면서 눈으로 감상하는 데서 나아가 여러 감각을 사용해 지난 역사와 흔적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건 공간의 외형이겠지만, 이보다 중요한 건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모여 장소의 이야기를 기억한다면 역사는 계속될 수 있어요. 문화공간 양에서는 그동안 축적해온 거로 마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다 듣고 난 후 마을을 둘러본다면 어느 풍경도 그냥 보이지 않을 겁니다.



➊ 양의 안내를 들어라, 문화공간 양
마을 내력을 잘 모르는 외부자의 눈으로 보면 거로 마을은 화북2동의 다른 마을과 다를 것이 없어보일지 모른다. 거로 마을을 여행할 땐 가장 먼저 문화공간 양에 들러 가이드를 받도록 하자. 이지연 작가의 필체가 돋보이는 마을 지도를 펴놓고, 차츰 어떻게 둘러보면 좋을지 샅샅이 안내받을 수 있다. 김범진 관장 외가의 가옥을 고쳐 만든 2개의 전시실을 비롯해 공간 한편에 놓인 마을 목욕탕의 무쇠 욕조 또한 볼거리다. 욕조는 옛 미군정의 위생 사업으로 조성된 마을 공동 목욕탕에 있던 것으로, 마을 어르신께 기증받았다.
주소 제주시 거로남6길 13 전화 064-755-2018 시간 목~일 12:00~18:00(이 외 시간대는 예약 방문)

➋ ‘당’과 ‘충’의 기묘한 만남, 당충대
마을 당은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제주에서 신앙의 터전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 제주의 민간 신앙을 약화시키고, 유학의 기틀을 잡기 위해 섬 전역에 당을 없앤 때가 있었다. 이후 다른 마을에는 당이 부활했지만, 유학으로 이름난 거로 마을은 유일하게 그러질 못했다. 당충대는 거로 마을의 옛 당이 있던 자리로, 이름에 ‘충’을 붙여 유교 색을 입혔다. 나무 그늘이 깊어 잠시 쉬어가기 좋다.

➌ 꼬닥꼬닥 걷기 좋은, 능동산
마을 북쪽에 자리잡은 능동산은 그야말로 동산이라 느긋하게 거닐기에 좋다. 능동산 앞 ‘한라산 국청사’를 찾아 그 뒤로 올라가면 금방 정상이다. 멀리 한라산을 배경으로 귤밭이 이어지고, 능동산 너머로는 화북동 풍경이 펼쳐진다. 화북공업단지의 건조한 빛과 여름 바다는 의외로 조화롭다.

➍ 그 천에 이름이 많은 이유, 화북천
거로 마을을 오른쪽에 끼고 화북포구 방향으로 흐르는 화북천은 예로부터 마을의 귀한 자원이었는데, 이는 천을 부르는 이름이 많은 데서 알 수 있다. 다옥내, 몰푸리, 단물, 원남소, 섯내 등 천은 하나인데 이름은 끝이 없다. 말이 물을 마시던 곳, 여자와 남자가 각각 목욕하던 곳 등 용처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인 까닭이다. 지금은 군데군데 고인 물이 전부라 짐작해볼 따름이지만, 옛날에는 건천답지 않게 물이 풍부했다고 한다.

➎ 4·3의 흔적을 찾아, 4·3 만평 부지
문화공간 양의 두 가이드로부터 적극 추천을 받은 ‘흔적 여행’ 장소로, ‘화남경로당’ 건너편에 있는 주차장이 바로 그곳이다. 옛날 그 일대는 모두 밭이었다는데, 4·3 때 마을이 전소된 후 온 마을 주민이 모여 이곳 3만3000㎡(1만평) 밭 둘레에 4~5m에 이르는 성을 쌓고, 4·3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참담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을 지켜준 내력이 깃든 공간이다.
화남경로당 제주시 거로중길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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