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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투어 마을참견 2 <이성훈 삼촌이 들려주는 ‘술 다끄는 마을’ 고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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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리 명물은 물론 수월봉이지만, 그곳만 보고 마을을 떠나서는 섭섭하다는 이가 있다. 대대손손 내려온 누룩으로 고산 특산주를 만드는 이성훈 삼촌이다. 제주에서 보기 드문 곡창 지대이자, 곡류가 풍부해 일찍이 술 빚는 문화가 발달한 고산리에서는 일단 한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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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마을이성훈 삼촌이 들려주는 ‘술 다끄는 마을’ 고산 이야기
고산리 명물은 물론 수월봉이지만, 그곳만 보고 마을을 떠나서는 섭섭하다는 이가 있다. 대대손손 내려온 누룩으로 고산 특산주를 만드는 이성훈 삼촌이다. 제주에서 보기 드문 곡창 지대이자, 곡류가 풍부해 일찍이 술 빚는 문화가 발달한 고산리에서는 일단 한잔해야 한다.

수월봉 정상의 정자 아래에는 술 시음장이 있다. 감귤 막걸리나 오메기‧고소리술을 맛보는 곳인가 했더니 고산 마을에서 직접 담근 술이라고 한다. 황칠나무 잎을 넣어 향긋한 ‘황칠주’와 야관문의 은은한 향미가 매력적인 ‘어우야’가 그 주인공이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깔끔한 맛에 감탄하며 “황칠나무와 야관문이 고산의 특산품인가요?” 묻자 시음을 돕던 안내원이 방긋 웃는다. “두 가지로 만든 술에 공통으로 넣는 누룩이 우리 마을 특산품이에요.”
집집마다 술을 담가 먹던 시절, 고산은 제주에서 이름난 ‘술 다끄는 마을’이었다. 토양이 물을 머금지 못하는 섬의 다른 지역과 달리 고산은 흙이 부드럽고 차져 예부터 농사가 잘 됐다. 심으면 뭐든 잘 자라는 건 물론 제주에서 유일하게 논농사가 가능해 잉여 곡식으로 술 담그는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점토질의 흙은 도자기에도 적합해 일찍이 제주식 소줏고리인 ‘고소리’를 만들어 사용했다. 특히 고소리로 내린 보리소주가 유명했다. 오래전 교통이 불편하던 때에도 제주 동녘에서 서쪽 가장 끝에 자리한 고산리까지 제수용 술을 사러 왔을 정도다. 마을의 전통을 살려 고산리의 토착 효모로 빚은 술을 가지고 마을 사업을 시작하자는 아이디어는 일찍이 전통주 양조를 공부한 토박이 이성훈 삼촌에게서 나왔다. 마을 협동조합 ‘왕지케양조장’을 운영하는 삼촌에게 마을에서 술 다끄던 이야기와 이곳 술맛이 특별히 좋은 이유를 물었다.


술을 맛봤는데, 정말 수준급이었어요. 마을에서 만든 누룩 덕분이라고요?
네. 할머니 때부터 내려오는 붉은 누룩을 사용해서 술을 빚고 있거든요. 술맛이 괜찮지요? 여름날이면 어머니가 누룩으로 만든 쉰다리가 늘 냉장고에 있었어요. 저는 그걸 마시면서 자랐고요. 지역마다 고유한 토착균이 있고, 토착균이 만들어지기까지는 환경의 영향이 크게 작용해요. 그런데 고산리의 환경은 독특한 데가 있어요. 옆 마을이나 주변 마을은 비가 퍼붓는데, 고산리는 안 오거든요. 비가 드물고 바람이 세니 호기성 미생물이 잘 증식합니다. 붉은색을 띠는 누룩은 다른 지역에도 있지만, 우리 마을 누룩처럼 색이 짙고 두터운 것은 거의 없어요.
왕지케양조장 덕분에 고산리를 알게 된 사람도 많겠어요. 마을은 언제부터 술로 이름났나요?
고산리는 제주의 대표적인 평야 지대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쌀이 나던 지역이에요. 다른 지역과 달리 토양이 점토질이고, 지하수가 풍부해요. 지금 보이는 마을 평야는 예전에 전부 논이었죠. 잉여 곡물이 많은 지역은 원래 술이 발달합니다. 환경적 조건 덕분에 균이 좋아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으면 자연히 맛이 좋았어요.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제주 동쪽 마을의 부잣집에서는 제삿날 즈음 보리 두 가마니를 지고 와서 고산 마을에서 만든 보리소주 한 병으로 바꿔갔다고 해요. 조선 시대에는 제주목사가 부임하면 수월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 고산리에서 술을 사갔답니다. 특히 술맛이 좋기로 소문난 마을의 한 아주머니는 막걸리 팔아서 자식들을 대학 공부까지 시켰어요. 최근의 일이기도 하고요.
고산리는 대대로 부자 마을이었겠어요.
그럼요. 고산리의 별명이 ‘부자 마을’이랑 ‘과부촌’이었어요. 이 별명은 어찌 보면 물자가 풍족한 마을의 명과 암이라고 할 수 있죠. 농사가 잘 되고 돈이 많다 보니 남자들 가운데 한량이 많았어요. 경제 활동은 여성에게 맡기고 밖으로 나도느라 마을에 남자가 없어서 과부촌이라고 했던 것이죠. 요즘은 양곡이 풍부해지면서 예전만큼 부자 마을은 아닙니다만.(웃음)


양조장 한편의 항아리에서는 술이 익고 있다. (좌) / 상온에서 얼맘나 견딜 수 있는지 실험 중인 누룩. (우)
삼촌은 언제부터 양조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젊었을 때 정치 분야를 기웃거렸는데, 그때 고급술의 맛을 알아버렸어요. 나중에 술 마시는 것 말고 양조에 관심이 생겼죠. 저는 어릴 적부터 할머니나 어머니가 누룩을 뜨고, 술 담그는 걸 오랫동안 봐왔잖아요. 제주에서 술 담그는 건 국 끓이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보통 마을의 여성들은 밭일이나 물질로 바쁘니까 틈날 때마다 있는 재료를 가지고 술을 후딱 담갔어요. 양조 절차나 체계 같은 것을 학술적으로 따진다면 잘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동안 보아온 술 빚는 과정은 대체로 간단한 것이어서 저 역시 쉽게 접근했어요. 할머니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하겠다 싶었고, 이참에 배워보자 한 거죠. 마침 ‘수수보리아카데미’가 처음 출범했을 때라 거기서 공부했고, 이장님이 마을 사업으로 함께 키워보자고 한 것이 지금의 양조장으로 이어졌어요.
왕지케양조장 술맛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고산리는 일찍이 소주로 유명했어요. 마을 점토로 옹기를 빚고, 옹기 고소리(소줏고리)로 양조하는 증류주가 발달했지요. 왕지케양조장에서는 처음에 소주를 만들었는데, 막상 재미를 못 봤어요. 사실 소주를 제조하는 데는 ‘균’이 그리 중요하지 않거든요. 아무 균이나 넣고 막걸리를 만든 뒤에 증류시키면 되니까요. 그런데 고산리 마을의 누룩은 원체 균이 좋잖아요. 균이 맛을 좌우하는 발효주로 선회한 것이 지금의 술이 됐어요. 왕지케양조장에서 출시한 5종은 재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모두 같은 누룩을 써서 만들어요. 마을 사업 초창기에 이 누룩이 사업성이 있는지 연구 기관에 의뢰했더니 몸에 좋은 성분이 나왔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6종의 미생물이 검출됐어요. 정말이지 마을의 귀중하고 고유한 균이죠. 균에 대해서는 제주생물종다양성연구소에서 계속해서 연구 중입니다.
균이야말로 마을의 자산이네요.
맞아요. 제주의 자산이기도 합니다. 제주의 술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게 균입니다. 제주에서 술은 국 끓이듯 있는 재료로 금방 담그는 거라고 말했던 대로, 목욕재개하고 옷 갖춰 입고 위생 챙겨가면서 작업하는 게 아니라 밭일하다 들어와서 손 털고 후루룩 만들어서 (술)독에 앉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균이 세야 해요. 웬만한 외부 균에는 끄떡 않고 버틸 수 있는 균이어야 상하지 않고 술이 되니까요. 좋은 재료나 엄격한 절차, 섬세한 통제보다 ‘강한 균’이 제주 술을 관통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이성훈 삼촌이 해안 절벽을 따라 놓인 ‘엉알’을 가리키며 마을 여행 코스를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 고산리가 어떤 마을이 되기를 바라나요?
개인적으로는 마을이 너무 변하지 않고, 이대로 오래 머물러 있으면 좋겠어요. 고산리는 30년 전 선사 유적지가 발굴되면서 개발 제한 지역이 되었어요. 마을 주민의 재산권이 침해당한 측면이 있지만, 덕분에 개발 광풍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죠. 만약 이 규제가 풀린다면 다른 마을과 다름없이 개발 압력을 받을 거예요. 지켜본 바에 의하면 마을 주민들의 형편이 넉넉하면 난개발이나 무분별한 외부 자본의 유입을 막을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주민들이 전부 농사에 기대고 있을 땐 편차가 커져요. 농산물 가격이 좋을 때는 사람들의 살림살이가 괜찮은데, 가격이 떨어지는 순간 농지가 막 경매에 나와요. 양조장 역시 이러한 현상에서 시작한 마을 사업의 일부입니다. 술 만들고, 가공 식품 개발하고, 관광 상품을 출시해서 농사가 휘청할 때 주민들이 버틸 수 있도록 자생력을 기르자는 취지였지요. 앞으로는 양조장이 마을 전통과 풍경을 보존하는 데 보탬이 되면 좋겠네요.

➊ 수월봉에서 마을의 낮과 밤 감상하기
수월봉은 높이 77m의 나지막한 언덕이지만, 제주의 곡창 지대로 이름난 고산 마을 전경을 둘러보기에 최적의 장소다. 시야에 걸리는 것 없이 초록색 밭이 시원스럽게 펼쳐진 풍경은 묘한 포만감을 준다. 여기서 보이는 밭이 옛날에는 전부 논이었다고 하니 ‘부자 마을’ 고산의 위세가 짐작된다. 차로 올라갈 수 있지만 걷어갈 것을 추천한다. 길지 않은 구간에서는 땀이 날까 말까 할 때쯤 정상에 이른다. 구불구불 유려하게 흐르는 수월봉 절벽 풍경을 한층 다이내믹하게 즐기고 싶다면 밤 산책이 제격이다. 제주 최서단에 있는 수월봉 일대는 이름난 일몰 포인트이므로, 해 질 녘에 방문하면 낮과 밤 두 버전을 모두 즐길 수 있다.

➋ 전기자전거 타고 엉알길 달리기
‘엉알’은 높은 절벽 아래 바닷가라는 뜻이다. 해안 절벽을 따라 놓인 엉알길은 긴 듯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가볼 만한 구간이다. 절벽의 독특한 해안 식생은 물론 용암이 바닷물을 만나 탄생한 주상절리, 일본군이 조성한 갱도진지 등 볼거리가 상당하다. 혹 여름날의 뙤약볕이 두렵다면 수월봉 입구에서 전기 자전거를 빌려 타는 방법도 있다. 마을 공동 사업으로 운영하며,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엉알길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➌ 제주 고산리 유적 센터 둘러보기
“우리 어릴 때는 땅 파면 늘 뭐가 나왔어요. 그걸로 그림 그리고 놀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신석기 유적이었지 뭐예요.” 삼촌의 말대로 고산리는 마을 전체가 거대한 신석기 유적지다. 1987년 한 주민의 신고로 지표 조사와 발굴 조사를 거친 결과, 고산 마을에서 발견된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임이 밝혀졌다. 유적의 발굴 과정과 토기, 화살촉, 찌르개 등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쓰던 각종 도구를 살펴볼 수 있다.


➍ 무명서점에서의 휴식
마을의 오래된 상가 2층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공간이다. ‘이름 모를 책들의 여행’이란 모토 아래 시, 사랑, 정치, 자연 4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책방지기가 정성스레 선별한 책을 살펴볼 수 있다. 작은 마을에서 복합 문화 공간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독립서적 만들기 클래스, 그림 전시, 소규모 독서모임 등 연중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참가를 원한다면 인스타그램을 예의주시하다가 신청할 것.
주소 제주시 한경면 고산로 26 2층 전화 010-6390-3136


➎ 왕지케양조장에서 고산 특산주 시음
‘균 좋은 마을’의 균으로 만든 술을 맛볼 기회이자 고산 마을 투어의 하이라이트. 수월봉 정상의 팔각정 아래 시음장에서 마시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마을 중심부에 있는 왕지케양조장을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 양조 시설을 둘러보며 전문 양조사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라산에서 자란 야생 야관문과 당귀, 계피를 넣고 우린 물에 당과 효모를 첨가해 45일간 발효시켜 만든 술 ‘어우야’는 약재 향이 은은한 가운데 달큰하면서도 부드럽고 청아한 맛이 일품이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이도 얼마든지 즐길 만한 풍미다. ‘황칠주’는 제주산 황칠나무 잎을 재료로 같은 방식으로 양조했다. 도수는 같은데, 어우야보다 맛과 향은 묵직한 편이다. 최근에 출시한 ‘주작’은 한경면의 대표 작물인 비트로 색과 맛을 냈다. 붉은 고운 빛깔에 한 번, 달큰하고 산뜻한 맛에 한 번 더 반한다. 고산의 ‘붉은 누룩’으로 만든 세 가지 술을 비교하며 골라 맛보는 재미를 즐기는 애주가의 코스로 손색없겠다.
- 유의사항
- ※ 위 정보는 2022-11-15 에 작성된 정보로, 이후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 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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