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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마을

(오라동 4.3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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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마을(오라리 방화사건 현장)

[오라동 4.3길]

오라동 4.3길은 제주 4.3사건 당시 도민들이 겪었던 고통의 역사를 기억하고 이를 통해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기 위해 조성된 역사 교육의 길이다. 이 길은 도민들과 함께 만들어진 8개의 '4.3길' 중 하나로 아름다운 제주의 풍경 속에서 4.3의 진실을 바로 알기 위한 소중한 여정이기도 하다.  


제주시 중심부에 위치한 오라동은 4.3사건 초기부터 많은 사건이 발생해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일대에서 벌어진 '3.1 발포사건'의 희생자 6명 중 2명이 오라리 출신이였고, 1948년 4월 한 달 동안은 무장대와 경찰의 충돌로 인해 주민들이 납치되거나 희생되는 비극이 이어졌다. 


특히 1948년 4월 28일, 국방경비대 제 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은 전투 중지를 위한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나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하며 협상은 무산되고 미군정은 정책을 강경 진압으로 전환하게된다.

 
당시 오라동에서는 약 240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으며, 어우늘, 해산이, 고지레 등 일부 마을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그 아픔을 전하고 있다. 오라동 4.3길은 이러한 피해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현장 곳곳에는 당시의 흔적과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라동 방화사건]

4·28 평화협상 사흘만인 5월 1일 벌어진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은 협상이 파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은 제주읍 중심에서 약 2㎞ 가량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에 우익청년단원들이 대낮에 들이닥쳐 10여 채의 민가를 태우면서 시작됐다.


오라리에서는 4‧3무장봉기 이래 무장대와 경찰로부터 각각 죽임을 당하는 인명희생 사건이 몇차례 발생했다. 4월 29일에는 오라리 마을의 대동청년단 부단장과 단원이 납치된 후 행방불명되었고, 4월 30일에는 동서간인 대청단원의 부인 2명이 납치됐는데 두 여인 중 한 명은 맞아 죽고 한 명은 가까스로 탈출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5월 1일 벌어졌다. 오전 9시경 전날 무장대에게 살해된 여인의 장례식이 열렸다. 마을 부근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경찰 3~4명과 서청‧대청 단원 30여 명이 참여했다. 매장이 끝나자 트럭은 경찰관만을 태운 채 돌아갔고 청년단원들은 그대로 남았다. 그 중에는 오라리 출신 대청 단원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오라리 마을에 진입하면서 좌파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들의 집들을 찾아다니며 5세대 1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연미마을(오라리 방화사건 현장)
연미마을(오라리 방화사건 현장)
연미마을(오라리 방화사건 현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