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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가 만난 근대의 흔적 <근대 제주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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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곳곳에는 이제는 낡고 옛스러워 보이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제주는 가장 늦게 근대라는 변화를 맞이했지만 그 시대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주 근대건축들을 둘러보며 이국적인 사진 한장을 남겨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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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정신 오롯이 담긴 건축물을 찾아서제주도가 만난 근대의 흔적 <근대 제주건축>
대한민국에서 제주는 근대라는 변화를 가장 늦게 맞이한 지역 중 하나다. 그 대신 그 시대의 흔적이 가장 잘 남아있는 곳 역시 제주다. 한 사회의 시대를 읽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건축은 한 시대의 문화와 정신을 잘 담아내곤 한다. 제주도 곳곳에는 이제는 낡고 예스러워 보이지만, 서양으로부터 전해온 근대건축양식이 제주사회에서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보여주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좋은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항상 그 어떤 이야기를 찾아내고 낯선 사진을 남긴다. 제주 근대건축물들을 둘러보며 흑백영화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 이국적인 사진 한 장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제주도의 근대 건축물을 이야기하면서 김중업 건축가의 구 제주대학교 본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64년에 설계되어 1965년 국전에 출품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한 건물로, 김중업 건축가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21세기의 건축’이었다. 마치 21세기에 살고 있던 한 건축가가 반세기 전으로 회귀하여 세운 건물인 듯 지금의 건축디자인과 비교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어 놀라움을 자아낸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던 건축물이었다. 한국 건축에 본격적인 모더니즘을 수용하고 작가 손을 거친 건축물이 등장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었으며, 그 중심엔 김중업 건축가가 있었다. 구 제주대학교 본관은 현재의 제주대학교 위치가 아니라 용담동 부지에 있었다. 구 제주대학교 본관은 김중업 건축가가 귀국한 후에, 현대건축의 원리와 한국의 서정을 융합시킨 걸작으로 ‘한국모더니즘 건축의 효시’라 일컫는 프랑스 대사관의 후속 작이라 할 수 있어 그 가치를 더한다. 설계 당시 정확한 건물 명칭은 제주대학 법문학부. 도서관과 교수 연구실인 학생회의실, 실습실, 학생식당과 도서관, 행정실, 학교 박물관이 포함된 다기능의 복합시설이다.



암울한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났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1951년 1월 당시 영남지방과 함께 북한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제주도로 육군 제1훈련소가 이전한 뒤 병사들을 길러내며 국난 극복에 일조하였다. 당시 훈련소장 장도영 소장은 장병들이 종교 생활을 통해 강인한 정신력을 키울 수 있도록 1952년 5월 1일 대정읍 상모리 3846번지에 교회를 착공, 같은 해 9월 14일에 준공하였다. 1953년 1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가 ‘강병대(强兵臺)’로 명칭이 바뀌며 교회 이름도 ‘강병대 교회’로 정착했다. 이 교회는 원래 의도였던 군인들을 위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려운 주민들과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도민들의 희망 이 되어주기도 한 곳이다.
암울한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피어났다. 6.25 전쟁 발발 이후 북한군의 화력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던 한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마지노선으로 설정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1951년 1월 당시 영남지방과 함께 북한군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제주도로 육군 제1훈련소가 이전한 뒤 병사들을 길러내며 국난 극복에 일조하였다. 당시 훈련소장 장도영 소장은 장병들이 종교 생활을 통해 강인한 정신력을 키울 수 있도록 1952년 5월 1일 대정읍 상모리 3846번지에 교회를 착공, 같은 해 9월 14일에 준공하였다. 1953년 1월 21일 육군 제1훈련소가 ‘강병대(强兵臺)’로 명칭이 바뀌며 교회 이름도 ‘강병대 교회’로 정착했다. 이 교회는 원래 의도였던 군인들을 위하는 일뿐만 아니라, 어려운 주민들과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어린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도민들의 희망 이 되어주기도 한 곳이다.

평화로에서 금악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이시돌 목장이 나오는데 그곳에 아주 작고 독특한 모양의 테쉬폰 건물이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호빗족이 살고 있을 것 같이 생긴 이국적인 테쉬폰은 어느 이름 모를 타국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때문에 이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가 좋아서, 결혼을 앞두고 우아하면서도 영화 같은 추억을 남기고 싶은 예비부부들의 사진 촬영 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테쉬폰’ 양식은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가까운 ‘테쉬폰(Cteshphon)’이라는 지역에서 2000년 전 지어진 건축 형식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아일랜드 건축기술자 제임스 윌러가 이 형식을 이용해 만든 구조형식을 ‘테쉬폰 시스템’이라 했다.

물결 모양의 아치가 연속된 조가비 형태를 하고 있으며, 기둥 없이 내부 공간이 넓은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곡선형의 건물 외형으로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에 잘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테쉬폰은 합판으로 기본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가마니를 덮어 시멘트를 덧발라 만드는 방식으로 건축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테쉬폰 주택은 1961년 이시돌목장이 조성되자 임피제 신부가 고향 건축 양식인 테쉬폰 건축기술을 목장 내 숙소 건축에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 그 후 조금 작은 규모로 제작해 돈사로도 건축되었다. 이 이국적인 건축양식은 제주의 하늘과 풍경 속에서 그 건축양식이 태어난 본국보다 더욱 이색적인 장면으로 탄생한다. 테쉬폰 주택은 이후 다른 지방으로도 보급되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현재 제주에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자료에 따르면 현재 도내 테쉬폰은 금악, 선흘, 귀덕, 동광에 10여 동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중 복원이 가능한 건물은 몇 채 되지 않아 건축계에서 보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주 최초의 복합건물’. 1965년 건립한 영화관 ‘동양극장’의 새로운 이름이 바로 ‘시네하우스’였다. 기성세대의 추억과 낭만을 함께 한 이 극장은 ‘시네하우스’라는 이름으로 2000년대 초반까지 운영을 하였지만 지금은 문을 닫은 상태이다. 동양극장은 전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던 제주 현대건축가 1세대 김한섭 건축가가 설계했다. 동문시장과 함께 자리 잡게 설계한 제주 최초의 복합건물이다.
동양극장의 규모는 1200석. 이는 당시 제주극장이 475석, 대정 상설극장이 350석, 대한극장이 598석, 삼일극장이 756석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월등히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극장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출입, 매표를 위한 공간으로 두고 2층에서만 영화를 보게 했다. 시네하우스는 바깥에서 볼 때 오른쪽 원형 창문이 여객선의 창문을 떠올리게 한다. 굴곡진 지붕의 형상은 파도가 물결치는 것을 닮아서 제주다움에 대한 김한섭 건축가의 고민이 엿보인다. 건축가들이 “원도심의 당당한 랜드마크로 지금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라고 평가를 할 정도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극장은 이제 건물만 남아 형태 없는 추억과 함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연세가 좀 있으신 제주도 주민이라면, 누구든 그 건물을 보고 옛 추억에 잠길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기억 속에서 '씨네하우스'는 여전히 추억이라는 이름의 영화를 상영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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